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메르 제국 (문단 편집) ==== [[수리야바르만 2세]] ==== 크메르 제국은 12세기 동안 군소 왕국들에게 치이는 한편 내전에 시달리면서 상당히 어지러운 세월을 거쳐야만 했다. 이 난세의 한복판이었던 1113년에 즉위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수리야바르만 2세]]'''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제국의 지방 통치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 거점에서 힘을 길렀고, 어느 정도 세력을 모으자 늙고 무능한 왕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끝끝내 1113년에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를 몰아내고, 크메르 제국의 왕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제국 재건의 원대한 꿈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즉위 직후부터 정복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수리야바르만 2세는 생각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바로 인근의 [[참파]]와 [[베트남]]의 [[리 왕조]]가 상당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크메르 제국을 틈틈히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27년 수리야바르만 2세는 리 왕조의 [[신종(리)|신종]]에게 봉신국이 되어 조공을 바칠 걸 요구했지만 신종이 이를 거부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28년 20,000명의 대군과 7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리 왕조로 쳐들어갔다. 4년 후인 1132년에는 [[참파]]와 동맹을 맺어 힘이 약해진 대월을 한꺼번에 때리자는 협약을 체결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베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들 중 하나였던 응에안 성을 함락시키고 해안가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베트남 북부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리 왕조를 복속시키는 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참파와 크메르 제국의 일시적인 동맹은 1138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참파가 독자적으로 리 왕조와 화해하고 평화조약을 맺자 크메르와 참파와의 관계도 바로 틀어졌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독자적으로 리 왕조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참에 안그래도 괘씸하던 참파에게 관심을 돌려버렸다. 의외로 참파에 대한 초기 원정은 술술 풀리는가 싶었는데, 1145년에는 공격 대상을 리 왕조에서 참파로 돌려 참파를 침공, 참파의 국왕이었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를 죽이고, 수도 비자야를 약탈하는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자야 인드라바르만 3세가 죽은 직후 새로 즉위한 자야 하리바르만 1세가 죽을둥살둥 크메르 제국에게 반격하면서 크메르 군대가 참파 지방에 묶여버렸고, 수리야바르만 2세가 참파의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놓았던 하리데바 왕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탈탈 털리면서 참파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 외에 밤사라자라는 이름의 배신자가 자야 하리바르만 1세를 배신하고 참파를 뒤엎으려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리 왕조로 도망쳤다. 밤사라자는 훗날 자야 하리바르만 1세에게 살해당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1150년까지 참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원정을 단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파일:d62e8410759160caa2db7dee76452cb1.jpg|height=300]]||[[파일:cambodia_angkorwat_11_8_2014_101_SW_1_rs_wm_suryavarman_procession_suryavarman_court.jpg|height=300]]|| ||전성기 시절의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에 새겨진 [[수리야바르만 2세]]의 부조. || [[리 왕조]] 및 [[참파]]에 대한 원정은 썩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어쨌든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함락해 약탈하기까지 했고, 리 왕조와 참파의 국력을 확연히 약화시켜 놓았으며 당대 동남아시아 최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고수할 수 있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렇게 이룩한 국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114년에는 기존의 패권국이었던 [[촐라 제국]]의 황제 쿠로퉁가 촐라 1세에게 보석을 바치는가 하면 [[1116년]]에는 저 멀리 중국의 북송에 사신을 보내 동남아시아의 군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패권국으로 인정받았던 셈이다. 이 덕에 촐라와 중국으로부터 여러 선진 문화들이 빠르게 유입되면서 건축, 복식, 식생 등 여러 분야에서 폭등적인 발전이 일어났고, 이는 크메르 제국의 발전이 정점을 찍는 계기가 되었다. 그 유명한 '''[[앙코르 와트]]'''가 지어진 것도 바로 이 수리야바르만 2세의 치세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참파에 대한 군사 원정 도중인 1150년 경에 붕어했다. 왕위는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에게 계승되었지만 아무래도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가 전임자만한 카리스마가 없다보니 크메르 제국은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가 별다른 업적도 못남기고 1160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이었던 '''야소바르만 2세'''가 새 국왕이 되었지만 6년만에 부하에게 암살을 당해 세상을 떴다. 야소바르만 2세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은 야소바르만 2세의 충성파들을 억누르고 간신히 제위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외세인 [[참파]]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내전으로 크메르가 흔들리는 틈을 타 참파가 크메르 제국을 침공해 1177년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을 죽이고 수도를 약탈한 것이다.[* 톤레삽 호수에서 치러진 해전에서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이 이끌던 크메르 함대가 대파당하고, 참파의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가 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 제국은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가 털리는 굴욕을 당하며 잠시 망하는가 싶었지만... 또다른 명군인 [[자야바르만 7세]]가 나타나면서 다시 중흥을 맞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